들려오는 말씀에 복종하여 믿음으로 결단한 바로 이 순간,

이 순간이 곧 그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할 때의 때(카이로스)입니다.

이 때를 히브리서 4 7절에서는 ‘오늘’이라고 부릅니다.

즉 오늘이라고 하는 이 날은 곧 자신에게 주신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여

자신을 십자가 제단에 산 제물로 받친 순간 순간입니다.

내일의 염려걱정은 기도가운데 주님께 다 맡기고

어제의 원망불평은 십자가로 인해 단절되었기에

오늘 이라고 하는 결단한 순간 순간의 삶만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이 곧 그 때가 됩니다.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 되던 옛 사람의 삶이 끝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에게 있어서 세상 나라는 멈추고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입니다.

그 순간 순간이 끊기지 않고 지속된다면, 그것을 우리는 ‘영원’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과 함께 합니다.

전에도 계셨던 전능자께서는 오늘 이라고 하는 현재의 기억속에 존재하며

장차 오실 분은 오늘 이라고 하는 현재의 기대속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시는 전능자께서는 오늘 이라고 하는 믿음의 결단 가운데 현재하십니다.

그러나 장차 이 땅에서는,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던 분과만 함께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미래의 기대가 지금 이 순간 완전하게 충족되어 있기에,

미래(내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장차 오실 분은 이미 와 계십니다.

지난날의 희노애락은 그리스도안에서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빚었기에,

과거(어제)는 용서받은 사랑의 기억속에 추억으로만 존재합니다.

오늘(현재) 이라고 하는 이 날만이 순간 순간의 연속속에 영원히 존재할 뿐입니다.

 

때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연대기(크로누스)가 아닌 믿음의 결단(카이로스)으로 가질 때,

우리의 요한계시록 읽기는 새로운 지평을 갖게 됩니다.

-나팔-대접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연속을

역사속에서의 연대기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보지 않고

역사속에서의 믿음의 결단과 반복속에 강화된 의미전달로 보게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게 될 때에,

몇 년 몇 월 몇 일에 종말이 오는가 하는 시한부종말론은 부질없어 집니다.

왜냐하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오늘 이라고 하는 이 날에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는 삶의 자세속에

우리의 신앙세계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은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과정에 대한 묘사가 일곱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곱교회와 함께하시는 주님(1-3), 일곱인(4-7), 일곱나팔(8-11),

영적전쟁(12-14), 일곱대접(15-16), 악의세력의멸망(17-19), 최종모습(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