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읽기의 두 번째 단추는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나라가 임한 때 혹은 종말의 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나라가 임한 때는 언제입니까?

그 때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동일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결단한 사람에게는 지금의 순간이 바로 그 때입니다.

하지만 결단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때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그 때가 바로 지금의 순간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그 때가 허공을 향해 헛발질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까?

이것은 여기서 사용된 ‘때’의 단어가 크로노스(Chronos)가 아닌

카이로스(Kairos)이기 때문입니다.

 

크로노스는 24시간, 한 달, 일년 십년 등의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주관적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결단한 사람에게는‘그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하나님나라의 임함 혹은 종말이 됩니다.

즉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나라(옛 세상의 종말)가 옆에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믿지 않고 결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옆에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세계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으로 측정하려 하면,

자꾸만 헛발질을 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면서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들으며 가는 길이 곧 신앙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은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든지 안믿든지 누구나 다 그 사실 앞에 서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을 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믿는 자에게만 부활의 주님은 나타나 만나주십니다.

 

이러한 까닭에 성경은 연대기적인 기술보다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형성되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 사건연대가 때론 뒤죽박죽 이었던 것은

연대기적인 기술이 아닌, 메세지를 전달하는 카이로스의 관점을

우선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또한 메세지 전달의 기술방식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사건의 연대기적 배열이 아닌, 메세지 전달의 관점에서

기록하였습니다. 한 예로 19 19-21절은 재림때의 장면입니다.

그래서 연대기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들은 20장은 연속되는 장면이라는

선입관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20 1-6절은 재림의 연속된 장면이 아닙니다.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있는 장면입니다. 7절 부터가 연속장면입니다.

이것은 반복속에 강화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는 요한계시록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도를 미리 알고 있어야 수 많은

상징과 반복강화로 표현되어 있는 계시록의 숲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쓸데 없는 헛발질을 줄일 수 있습니다.